미국서 주요국으로 번지는 '행동주의 국채 발행' 위험한 이유

[서울=뉴스핌] 황숙혜 기자 = 바이든 행정부 시절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장기물 국채 수익률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한 이른바 '행동주의 국채 발행(ATI)'이 일본과 영국까지 확산되는 조짐이다.
이는 재무부 주도의 '뒷문' 양적완화(QE)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데 우선점을 두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엇박자를 일으킬 뿐 아니라 통화정책을 침범하는 행위라는 비판이다.
월가의 '닥터 둠'으로 통하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학교 교수는 6월4일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칼럼을 통해 소위 ATI(Activist Treasury Issuance)이 단기적으로 경기를 좋아 보이게 하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을 필두로 주요국 전반에 걸친 장기물 국채 수익률 상승은 각국 정부에 골칫거리다. 금리 상승은 공공 및 민간 부채의 이자 비용을 높일 뿐 아니라 경제 성장도 압박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포함한 중앙은행 정책자들은 과거 금융위기 당시의 통화완화 카드를 꺼내기 꺼리는 모양새다. 인플레이션이 목표치를 여전히 웃도는 상황에 장기물 국채를 매입하거나 금리 인하를 강행하기가 쉽지 않은 입장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국채시장 관리를 통한 우회적인 양적완화가 주요국 재무부의 선택지가 됐다고 루비니 교수는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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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0년물(검정)과 30년물(파랑) 수익률 추이 [자료=블룸버그] |
바이든 행정부 당시 미 재무부는 단기물 국채 발행을 확대하고 장기물 국채를 억제해 장기 금리 상승 리스크를 꺾어 놓았는데 루비니 교수와 스티븐 미란 트럼프 행정부 경제자문위원장은 이를 '행동주의 국채 발행(ATI)'라고 지칭한다.
ATI는 소위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T)'의 변형이라고 루비니 교수는 주장한다. 금융위기 이후 연준은 장기 국채를 매입하는 동시에 단기물을 매도해 장기 금리를 낮췄다. 반면 재무부는 장기물 국채 발행을 축소해 금리를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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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
이 같은 형태의 ATI는 명백하게 재정 당국이 통화정책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라고 그는 비판한다. 스콧 베선트 현 재무장관과 상당수의 공화당원들도 이 같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베선트 장관과 미란 위원장이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팀을 이끌고 있는데도 ATI는 멈추지 않는 상황. 이를 폐지하면 장기 금리가 급격하게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베선트 장관이 훨씬 더 깊은 형태의 재무부 주도 양적완화(QE)와 함께 ATI 시행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무질서한 금융시장 상황이 벌어질 경우 재무부가 장기 금리 상승을 억제하는 방안으로 장기물 국채를 더 적극적으로 환매할 수 있다고 밝혔다.
ATI는 미국 뿐 아니라 다른 주요국으로 전염되는 양상이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일본은행(BOJ)이 정책 금리 정상화를 시작하면서 2022년 이전 '서브 제로' 영역에서 등락했던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1.6% 상승했다.
공공 부채 비율이 GDP(국내총생산)의 250%에 이르는 가운데 장기 금리가 상승하자 일본 재무성은 장기물 국채 발행을 줄이고 단기 국채 발행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행(BOJ)이 양적완화(QE)를 재개하는 데는 디플레이션이나 경기 침체 등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는 상황에 재무성이 나서는 움직임이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ATI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루비니 교수는 영국을 꼽았다. 유럽중앙은행(ECB)의 경우 국가간 스프레드가 과도하게 벌어지면서 금융시장을 위협할 때 양적완화(QE)를 재개할 수 있는 긴급 장치를 확보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낮은 반면 영국은 불안정한 재정 상황을 감안할 때 유력한 후보지라는 얘기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정 당국이 장기물 국채 수익률의 상승을 억제하는 ATI와 같은 정책을 시행하려는 유혹이 점차 더 커질 것이라고 루비니 교수는 말한다.
이 경우 결과적으로 재정 당국과 통화 당국 사이에 정책 불일치를 초래하고, 레버리지를 통한 리스크 감수를 부추겨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ATI와 같은 조치들은 통화당국이 물가 안정을 달성하고 과도한 경기 과열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에 오히려 금융여건을 완화시킨다. 연준을 포함한 중앙은행의 정책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시장 전문가들은 ATI가 실질적으로 연준이 기준금리를 100bp(1bp=0.01%포인트) 인하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재무부의 '몰래' 양적완화(QE)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잠재 리스크는 작지 않다. 먼저, 금융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 어차피 정부가 나서서 장기 금리 상승을 막아 줄 것이라는 기대를 시장에 심어주기 때문.
투자자들은 보다 위험한 베팅에 나서게 되고, 이는 자산 버블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ATI가 더 큰 위기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플레이션이 재점화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금융 여건이 느슨해지면서 경제가 과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비니 교수는 이와 함께 소위 '정치적 경기 순환'을 우려한다. 선거 때마다 정부가 ATI 카드를 꺼내 경기를 부양하려고 할 수 있고, 경제 정책이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는 셈이 된다는 지적이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의 브레이크를 밟으려는 상황에 재무부가 몰래 엑셀을 밟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루비니 교수의 진단이다. 백악관은 재무 당국의 통화정책 침범이 가져올 위험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