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015년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때 약속 10년째 '모르쇠'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일본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한국과 전 세계에 했던 약속을 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행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이하 위원회)에 제출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관련 후속조치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드러났다.
위원회 31일(현지 시각) 일본이 제출한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일본에 역사 왜곡을 시정하고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며 요구한 모든 사항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군함도 강제징용 노동자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들. 오른쪽이 사이토 고이치 씨가 자신이 찍은 것이라고 밝힌 사진이다. 왼쪽은 지난 2017년 지쿠호 탄광의 일본인 광부 사진으로 밝혀졌다. [사진=EBS역사채널e] 2021.01.29 [email protected] |
일본은 앞서 2015년 하시마 탄광 등 등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 7곳을 포함한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한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또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은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강제노역 현장과 무관한 도쿄에 설치했으며 전시물에도 조선인 차별이나 인권 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등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등재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일본은 2017년과 2019년, 그리고 2022년 세 차례에 걸쳐 이행 경과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했으나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노역을 나타내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한국 측의 '성의있는 후속 조치 요구'도 무시해왔다. 이에 위원회는 2021년 제44차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일본 측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위원회는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자 2023년 45차 회의에서 당사국(한국)과 대화를 지속하고 조선인 노동자 강제노역 등 전체 역사를 설명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일본에 다시 요구했다. 위원회는 또 일본에 '유산 해석전략 강화를 위한 추가 조치들에 대한 진전 사항'을 제출할 것도 요구했다. 일본의 이번 보고서는 이같은 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번에도 위원회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 노동자 증언의 연구용 참고자료를 산업유산정보센터 서가에 비치했을뿐 증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또 강제동원 시설에서 다수의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실을 설명하라는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자료를 철거하라는 요청도 무시했다. 오히려 한국인 강제동원과 무관하거나 "노동환경 및 생활이 일본인과 차별적이지 않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자료를 추가했다.
외교부는 이날 일본의 이번 보고서와 관련해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내고 일본 측의 무성의한 태도를 비판했다. 외교부는 논평에서 "정부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과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들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다"면서 "일본이 국제사회에 스스로 약속한 바에 따라 관련 후속 조치를 조속히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재차 촉구한다"고 밝혔다.
빅철희 주일 한국대사가 지난해 11월 25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에서 열린 한국 정부 주최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해 묵념하고 있다. [사진=외교부] 2024.11.25 |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에 성실히 (우리와) 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할 것이고 정부 차원에서 앞으로 한·일 양자뿐 아니라 유네스코 틀 내에서도 일본의 약속 불이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이 앞으로 계속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면,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가 있는 다른 유산의 추가 등재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지난해 또 다른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모든 관련된 세계유산위원회 결정과 이와 관련된 일본의 약속을 명심하겠다"고 한국에 약속했다. 당시 정부는 이 언급을 두고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지난해 11월 사도광산 추도식 등을 통해 일본이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나 '외교적 참사'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번 보고서는 일본이 2015년부터 지금까지 조선인 강제동원을 일관되게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일제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인식을 고수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어서 올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협력 강화를 모색하던 한·일 관계에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부가 일본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관련 협상에서 일본의 '선의'에만 의존해 잇달아 실패한 것에 대한 비판도 다시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