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버전의 '마러라고 협정'은 잊어라"...펜실베이니아 플랜 가동

[서울=뉴스핌] 오상용 기자 = "국채 버전의 '마러라고 협정'은 잊어라. 믿을 것은 국내 자금 뿐이다."
주변국에 초장기물 국채를 강매하는 아이디어는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으니, 미국 정부는 늘어나는 국채를 소화하기 위해 내부 수요 기반 확충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월가에서 제기됐다.
국채 버전의 '마러라고' 협정이란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와 방위조약 등을 무기로 내세워 초장기물(가령 100년) 국채를 주변국에 강매한다는 개념이다. 스티븐 미란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작년 11월 발표한 보고서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가이드`에서 보완조치의 하나로 해당 아이디어를 제시한 이후 한동안 월가에서 크게 회자됐다.
도이치방크의 외환 리서치 헤드인 조지 사라벨로스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을 마러라고 협정은 머리에서 지우라고 했다. 대신 미국 안에서 국채 수요 기반을 확충하는 '펜실베이니아 플랜'이 현실적 방안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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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달러화 [사진=로이터 뉴스핌] |
◆ '펜실베이니아 플랜'
사라벨로스가 제시한 '펜실베니아 플랜'은 미국 재무부가 위치한 워싱턴 DC의 '펜실베이니아 거리(Pennsylvania Avenue)'에서 이름을 땄다.
쌍둥이 적자로 인해 미국이 당면한 '실재하는 거시경제적 제약(existential macroeconomic constraints)'을 외부 자금이 아닌, 미국 내부 자금으로 누그러뜨리는 게 골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론 머스크(테슬라의 머스크 CEO가 수장으로 일했던 정부효율부)를 내세워 재정의 군살을 빼려 했지만 결과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크고 아름다운 감세안'을 밀어붙이는 트럼프와 공화당, 그리고 재정지출 삭감에 저항하는 민주당 모두 당면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빈약하다.
이런 상황에선 해외 채권자들 역시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의 구조조정(초장기물 국채로 교환)에 응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오히려 (마러라고 협정과 같은) 파격적이고 섣부른 아이디어는 해외 자금의 불안만 자극할 뿐이다.
실제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해외 자금들의 움직임은 180도 달라졌는데, 이는 관세와 대외정책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일방주의 노선으로 한층 심화했다. 그 결과 "미국은 최근 급작스런 해외 자본유입의 중단을 겪었다"며 "이는 무역분야에서 정책 전환을 강제한 동인이기도 했다"고 사라벨로스는 설명했다.
교과서적으로 접근할 경우 "가장 명료한 해법은 재정긴축이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정치적 의지는 전무하다"는 게 사라벨로스의 판단이다.
현실적 대안은 미국 내부 동력에 더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사라벨로스가 제시한 '펜실베이니아 플랜'의 요체다. 그는 트럼프 정부도 결국 그 길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재정개선 의지가 빈약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은 국내 투자자를 통한 자금 조달을 미국 정부가 독려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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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 부채 전망 [사진=뱅크오브아메리카] |
◆ 연준 SLR 규제 완화...내부 수요 확충은 이미 시동
사라벨로스가 제시한 '펜실베니아 플랜'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우선 현실 자각과 인정이다. 사라벨로스는 "해외 자금들의 미국 국채에 대한 듀레이션 위험 노출도는 역대급으로 높아져 있다"고 했다. 이는 해외 투자자들이 미국 장기물 국채 포지션을 지속적으로 높여나갈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을 의미한다.
불어나는 부채를 더 이상 이들 자금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해외 자금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나가야할 필요성을 가리킨다. 사라벨로스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국채시장내) 수요의 선호도 변화에 호응하기 위해 "만기가 짧은 재정증권(T-Bill)에 기반한 달러 스테이블 코인을 장려하는 조치"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6월11일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미국 국채(Treasuries) 또는 재정증권(T-bill)을 담보로 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는 최소 2조달러 규모의 추가 국채 수요를 창출할 것"이라고 기대한 바 있다.
나머지 한 축은 인센티브를 통한 내부 수요 확대다. 월가 대형 은행들에 적용하는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SLR)'의 완화 ▲SLR 산정에서 미국 국채를 제외하는 방안 ▲장기 국채 보유자에 대한 세제 혜택 제공 ▲연기금(퇴직 연금)의 국채 매입 확대 의무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사라벨로스에 따르면 이는 해외 투자자에 편중됐던 듀레이션 리스크(금리 변동으로 국채 보유자가 감당하게 되는 자본손실 위험)를 국내 투자자로 옮겨 오는 역사적 전환에 해당한다고 평했다.
물론 "이러한 조치로 미국의 근본적인 쌍둥이 적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면서도 "국내 저축을 활용함으로써 시간을 벌 수 있고, 지속 불가능한 재정적자가 초래할 위험을 (재정적자를 다소나마 흡수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함으로써) 일정 부분 줄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현지시간 25일 연방준비제도가 마련한 SLR 규제완화는 '펜실베이니아 플랜'과 유사한 내부적인 국채 수요 확충 작업이 미국 정부 안에서 이미 가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날 연준 이사회는 미셸 보먼 금융감독 담당 부의장이 제출한 'SLR 규제 완화 방안'을 찬성 5명 대 반대 2명으로 가결했다. 덕분에 시장 일각에선 은행권의 국채매입 여력이 늘어 미국 국채시장의 수요 확충에 일정 부분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 美 연준, 대형은행 SLR 규제 완화..."국채시장 기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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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DC의 연방준비제도 건물.[사진=로이터 뉴스핌] 2024.12.12 [email protected] |
◆ 재정의 통화정책 지배 심화..."달러는 약해진다"
한편 사라벨로스는 "미국 국채 수요를 해외에서 국내로 돌리는 역사적 로테이션은 달러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동시에 장기물 국채 금리의 기간 프리미엄(Term Premium)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다. 국내 투자자를 장기물 국채에 효과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논리다.
기간 프리미엄은 만기가 긴 채권을 보유할 때 감당해야 하는 잠재 리스크에 대한 대가로 장기물 국채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일종의 보상 금리다.
미국 정부는 이에 따른 이자부담 증가를 억누르기 위해 연준을 더 압박하기 쉽다. 이처럼 재정에 의한 통화정책 지배가 심화하는 상황, 즉 정부 입김 때문에 연준이 완화정책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 심화하면 (연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외 자금들에 의해) 달러는 더 약해질 것이라고 사라벨로스는 내다봤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주요국의 불어난 정부 부채와 확대된 재정적자 때문이라도 향후 거시정책에서 통화정책의 사용 빈도는 더 늘어날 공산이 크다.
채권 명가 핌코 역시 현지시간 25일자 보고서에서 향후 경기 둔화 사이클에서 미국은 재정정책보다 연준의 통화정책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핌코는 "팬데믹 이전에는 금리가 낮았고 재정정책의 여력은 풍부했으며 통화정책의 여력은 제한적이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금리가 높고 재정 여력은 제한적이며 통화정책 공간은 풍부한 편"이라고 했다. 나아가 이는 통화정책에 민감한 단기물 국채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라고 했다.
다만 인플레이션과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로 주요국 장기물 국채에 투자하려는 이들이 더 많은 보상(텀 프리미엄)을 요구할 것으로 보이고, 국채 발행 역시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돼 수익률곡선은 장기적으로 가팔라질 것(스티프닝)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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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연방준비은행의 ACM 모델로 산출한 10년물 국채 수익률의 텀 프리미엄 추이 [사진 = macro.micr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