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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시장, 합을 맞춘 치킨게임?...트럼프 각본 & 사우디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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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오상용 기자 = 중국의 불행은 미국의 셰일 혁명에서 시작됐을 수 있다. 미국이 사실상 에너지 자립에 다가서면서 중동의 전략적 가치는 후퇴했고 덕분에 미국의 대외전략은 온전히 중국 견제에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중동에서 분쟁은 빈발했고 미·중간 감정의 골은 깊이 패였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야심차게 밀어붙일 '에너지 패권' 전략 역시 비슷한 함의를 지닌다. 대외 지정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파장을 촉발할 가능성을 띠는 것은 물론, 대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 안정과 일자리창출, 산업 경쟁 우위 확보(더 낮은 에너지 비용)라는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된다.

현지시간 23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에너지 정책이 이렇게 대내외 전략과 맞물려 돌아가며 한층 속도를 낼 것임을 알렸다.

산업의 영역에서 치킨게임은 서로가 시장 점유율을 놓고 출혈경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도 미국과 중동 산유국들 사이에 유사한 물량 경쟁이 벌어질 위험은 상존해 있지만 10년전과 달리, 잘 조율되고 합을 맞춘 양상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는 맹렬한 '치킨게임'보다 잘 짜여진 '증산 공조'를 바라는 눈치인데, 바람대로 된다면 트럼프 각본, 사우디 아라비아 연출이 될 것이다.

다만 사우디와 러시아가 10년 넘게 가동했던 감산동맹(OPEC+: 기존의 OPEC 산유국과 일부 비OPEC 산유국의 동맹체)체제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사안이라, 사우디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호응할지는 변수로 남는다.

1. 감산동맹(OPEC+)에 파열구

트럼프 대통령은 현지시간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화상 연설을 통해 "유가가 내려가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즉시 끝날 것"이라며 "지금은 전쟁이 계속될(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수행할 자금을 마련하기에 충분할) 만큼 유가가 높기 때문에 유가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우디가 진작에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그들(사우디)은 지금 벌어지는 일들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이날 발언은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을 향한 금리인하 압박과 선후 관계를 갖는다.

☞ 트럼프의 금리인하 압박...2018년의 추억과 '월러'의 밑그림

트럼프는 "유가가 하락함에 따라 (연준에) 당장 금리 인하를 요구할 것"이라며 "전 세계적으로도 금리가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사우디(중동내 수니파 산유국)가 손잡고 원유 공급을 늘려 물가 불안을 잠재울 테니, 중앙은행들도 여기에 발맞춰 금융환경을 이완시키자(완화적으로 만들자)는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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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블룸버그]

유가가 내려가면 러시아의 전쟁행위는 즉각 멈출 것이라는 트럼프의 발언은 러시아의 군자금 출처에 대한 것이다. 이미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이 퇴임 직전 러시아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매우 실질적이고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한 터라, 트럼프의 이날 발언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를 향해 자금줄을 더 조이겠다는 압박이자, 원유시장 공급 확대(중동 산유국의 증산)를 도모한다는 취지다. 트럼프의 속내는 후자에 더 가깝다.

사우디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물음표지만 수용한다면 사우디와 러시아가 주축이 된 감산동맹이 사실상 와해될 위험에 놓인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트럼프와 손을 잡을 것인지, 훗날을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유지할지 고민해야 한다.

사우디를 끌어들이려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겠지만, 트럼프 입장에서 일단 OPEC+의 대오가 무너지면 '에너지 패권 전략'을 구사하는 게 한결 수월해진다.

2. 치키게임 전조는 이미 넉달전부터

사실 그동안 감산동맹(OPEC+) 내에서도 감산을 지속하는 데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감산은 산유국의 생산활동 감소와 고용 위축을 의미한다. 더구나 감산동맹(OPEC+)이 유가를 떠받치기 위해 원유 생산을 줄이는 동안 그 빈 곳을 파고 든 이는 미국을 비롯한 비 OPEC 산유국들(캐나다 브라질 등)이다.

OPEC 내에서는 남 좋은 일만 한다는 불만이 커졌고 사우디 역시 감산에 따른 부정적인 경제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사우디보다 덩치가 작은 회원국의 경우 그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컸다. 때문에 OPEC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감산은 무리라는 관측이 자라났다.

현재 OPEC+는 일평균 586만 배럴의 감산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366만배럴의 감산 조치와 사우디가 주축이 된 220만배럴의 자발적 감산으로 구성돼 있다. OPEC+는 당초 2024년 12월부터 자발적 감산분(220만배럴)을 점진적으로 되돌리려 했지만 유가 흐름이 신통치 않자, 그 시점을 다시 오는 4월로 미룬 상태다.

일정이 늦춰지긴 했지만 OPEC+의 큰 방향은 감산 일변도에서 증산(감산의 되돌림)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이러한 정책방향 선회는 사우디발 치킨 게임의 재발 위험을 내포하는데, 설상가상 트럼프의 에너지 정책은 미국의 원유와 천연가스 생산을 대폭 늘리는 데 맞춰져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밥그릇(시장 점유율)을 놓고 미국과 한바탕 격전을 벌여야 할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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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 [사진=블룸버그]

3. 사전 각본이 필요한 이유

10년전 원유시장에서 벌어졌던 치킨게임(2014년 6월 시작해 19개월 동안 지속된 치킨게임)은 미국과 OPEC+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당시 원유시장 벤치마크인 브렌트는 20달러선까지 급락했다. 미국 셰일업계의 끈질긴 저항(구조조정과 생산성 혁신)에 막혀 결국 사우디와 러시아가 2016년초 생산을 줄이며 1차 치킨게임은 일단락됐지만 셰일업계 역시 출혈이 상당했다.

이런 전례 때문에 트럼프의 23일 발언은 사전에 합을 잘 맞춘 '치킨게임' 혹은 잘 조율된 '공조 증산' 카드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치킨 게임의 본질은 경쟁사의 생산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시장에 물량을 대거 풀어 제품 가격을 경쟁사의 생산 단가 밑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중동 산유국이 빼앗긴 점유율을 되찾기 위해서는 공급을 늘려 유가를 미국 셰일업계의 생산단가 밑으로 몰고 가야 한다.

실제 유가가 미국 에너지 기업의 생산 원가에 크게 못미치는 상황이 벌어져 그 상태가 지속되면 트럼프로선 적잖이 난감해질 수 있다. 자신의 바람대로 미국내 원유 생산을 대거 늘리는 게 어려워질 수 있어서다. 따라서 향후 치킨게임의 냄새를 풀풀 풍겨 유가를 낮추더라도 사우디와 사전에 합을 맞출 필요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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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시작된 원유시장 치킨게임 당시의 브렌트 유가 흐름 [사진=koyfin]

4. 희생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도 유럽은 "괘씸죄를 범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기 어렵다. 러시아산 에너지에서 작별한 유럽은 수입선을 계속 중동과 미국으로 돌려야 한다. 트럼프가 유럽을 향해 관세 칼날을 겨루고 있는 만큼 미국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늘리는 것은 유럽이 미국에 내밀 수 있는 다용도 협상 카드다.

이 경우 중동 산유국은 유럽 고객을 미국에게 더 빼앗기게 돼 불만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사우디는 원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려 산업 다각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웃 동생 국가들의 사정은 제각각이다. 사우디가 중동의 맹주 지위를 보장 받으려면 동생들의 불만도 챙겨야 하는 만큼 사우디로선 빼앗긴 유럽 고객을 벌충할 보상이 필요하다.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수니파 국가들을 달래기 위해 미국이 내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카드는 이란을 다시 제물로 삼는 것이다. 무력으로 이란을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이란산 원유가 국제시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정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걸로도 모자란다면 러시아산 에너지를 제법 오려 묶어 놓아야 한다.

물론 트럼프 입장에서 이러한 방편들은 유가를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유지해 인플레이션 안정과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동시에 추구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중국이 고강도 부양책으로 원유시장 수요에 충격을 가하거나, 사우디가 트럼프의 전략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는 이러한 전략 구사의 주요 불확실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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